개발자 레이첼에게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E.004
저는 평소에 개발, 프로덕트, 여성 3가지 키워드로 대화를 자주해요. 대화를 통해서 많은 깨달음도 얻고 지인들의 이야기를 공유하면서 또 깨달음을 얻고 그랬어요. 문득, 누구에게 고민을 털어놓거나 질문해야할지 모르는 사람들도 많지 않을까? 다른 분들에게도 이야기를 들으면 또 몰랐던 깨달음을 얻게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했어요. 화려하고 거창하지는 않지만 어떤 고민이든 어떤 질문이든 편하게 남겨주시면 진지하게 고민하고 좋은 형태로 답을 드릴게요. 제 이야기가 답이 아닐 수 있지만 답을 찾아가는 과정도 의미있을 것 같아요. 공유는 환영입니다!
수많은 고민과 질문이 저에게 도착했습니다. 뉴스레터 형태로 고민에 대한 저의 생각을 공유하고 있고요. 그렇게 공유한 저의 생각을 이곳에도 기록으로 남겨둘까 합니다.
✏️ 오늘의 질문: 여성/생존
여성이 혼자인 팀에서 개발하고 있습니다. 팀원들은 여성 개발자를 신기해하고, 종종 생각 없는 성차별 발언을 하십니다. 대부분 무시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화가 날 때 가 있습니다. 조언 부탁드립니다.
⭐️ 레이첼의 생각
여성이 혼자인 팀에서 개발한 적도, 기이한 생명체라도 본 듯 신기해하는 시선을 받은 적도, 생각을 거치지 않은 성차별 발언도, 모두 받아본 적 있는 입장에서 위로를 먼저 보냅니다. 우선 오늘의 질문에 대해 비교적 속 시원한 답을 드릴 수 없음을 먼저 말씀드려요. 10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이러한 부류의 차별을 받고 있지 않은가? 라는 질문에 나아지는 것 같지만 여전히 내 안과 밖에 무수히 많은 차별이 존재함을 알고 있습니다. 차별의 가해자는 우리가 아닌데, 끊임없이 행동했던 주체도 여전히 무거운 마음으로 이 고민을 끌어안아야 하는 주체도 피해자라는 현실에 내가 해왔던 것들이 무기력하게 다가오기도 하고요. 그래도 연대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피해서는 안 된다는 일종의 사명감으로, 제가 받은 차별에 행한 것들을 조금이나마 공유하고자 합니다.
여성 개발자를 신기해 하는 시선, 그리고 생각을 거치지 않은 성차별 발언에 관해 이야기를 전해보겠습니다.
여성 개발자를 신기해 하는 시선
어디를 가나 관심을 받는 존재였습니다. ‘우리 팀에 여자 개발자 들어왔대’, ‘직업이 개발자라고요?’ 심지어 ‘개발할 줄 알지?’. 개발이 전공이고 개발자라고 소개를 했음에도 개발할 줄 아냐니, 엿 같은 관심이었죠. 옹호하는 건 아니지만 그들이 왜 그런 발언을 악의 없이 쉽게 뱉을 수 있었는지 생각해 봤습니다. 제 답은 단순했어요. 모르기 때문이죠. 경험해보지 않았거든요. 여전히 이 업계의 성비 불균형은 심하다고 이전 뉴스레터에서도 언급했습니다. 제가 처음 사회에 발을 내디딘 10년 전에는 더했겠죠. 그들은 정말 모릅니다. 주변에는 온통 남성들만 가득했으니 간혹 마주치는 여성 개발자들이 신기함은 당연했겠죠. 이 무지를 잘못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잘못은 무지에서 시작된 생각을 거치지 않은 행위들이겠죠.
한 스타트업의 CTO로 출근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처음 출근했던 날을 여전히 잊을 수 없습니다. 그 회사의 대표는 동료분들에게 저를 소개했고, 기존 개발팀 분들에게도 저를 소개했죠. 기존 개발팀에 여성 개발자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한 친구의 얼굴이 여전히 선명합니다. 나라는 존재를 CTO로 소개하는 순간 신기함과 불신이 따르는 눈의 움직임을 포착할 수 있었죠. 너무나도 많이 받아온 반응이기에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습니다. 그날 부터 저는 그 친구의 시선에서 불신을 제거하는 게임을 하기로 다짐했습니다. 먼저 다가오지 않는 그 친구에게 다가가 문제를 공유받고, 그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내가 생각한 해결책을 함께 논의하는 그 과정을 무던히도 반복했습니다. 나를 신뢰하지 않는 사람과의 이 지난한 과정은 당시 내 일상 에너지 소모율 중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했죠.
그때의 저는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누구나 다 새로운 동료를 만나면 일종의 의심을 품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나랑 잘 협업할 수 있는 사람일지, 이 사람이 나랑 좋은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일지. 거기에 다른 성(性)에 대한 의심이 하나 더 개입했을 뿐이다. 새로운 동료와 합을 맞추는 마땅한 그 과정이 지났을 때 이 친구에게서 불신이 사라진다면 나는 사회적 약자인 여성으로 동작하지 않았을 테다. 다행히 그 친구와 저는 현재까지도 좋은 친구로 함께하고 있습니다. 신기함과 불신을 고백했고, 일련의 시간이 지났을 때 불신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존중이 채웠다고 또한 고백했습니다.
생각을 거치지 않은 성차별 발언
진짜 문제는 불신이 존중으로 대체되지 않고 여성을 사회적 약자로 동작하게 만들 때 발생합니다. 뇌를 거치지 않는 무례함이 그 자리를 채우게 되죠. 그런 상황에 놓였을 때 저는 2가지 원칙으로 행동합니다. 첫째, 상대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게 한다. 둘째, 연대한다.
저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개발 프로젝트에 적합하지 않다는 발언을 직접 들었다고 말씀드렸었죠. 저에게 그 발언을 하신 분의 표면적인 이유는 체력이었습니다. 개발 프로젝트는 야근을 자주 해야 하고 상대적으로 여성이 체력이 약하기 때문에 적합하지 않다는 얼토당토않은 이유였죠. 만약 저의 남성 동료가 누가 보아도 허약해 보이고 제가 건강해 보인다 한들 저에게 선뜻 개발 프로젝트를 맡겼을까요? 아마 체력이 아닌 다른 이유를 들고 여성인 저는 배제당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여성과 체력을 연결 지어 프로젝트 선택에 차별을 두는 것이 얼마나 비논리적인 행위인지 말해야 합니다. 상대방에게 받아들여지든 아니든 본인의 발언에 문제가 있었음을 알게해야죠.
하지만 항상 이렇게 행동할 수 없는 복합적인 이유와 환경이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사회적으로 더 힘이 있는 상대방이 뉘우침 대신 더 큰 배제를 행할 수도 있으니까요. 그럴 때는 연대합니다. 같은 회사의 다른 여성 개발자, 같은 업계의 또 다른 여성 개발자 혹은 이 사회를 견뎌내는 많은 여성분들과 함께요. 이미 비슷한 문제를 이겨내신 분들과 나누는 것만으로도 저는 행동할 힘을 얻고는 했습니다. 또, 직접적인 상대에게는 아니지만, 연대함으로써 얻고 공유하는 이야기들을 널리 알리며 남성 개발자분들이 인지하지 못했던 관점을 지각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참 길고 지루한 시간을 보내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앞이 선명하지는 않죠. 사회적 약자로서의 여성을 페이스북에 언급할 때마다 친구 수가 줄어드는 것을 보고 공감 능력 부족한 자가 또 멀어졌구나 하고 안타까운 감정을 느낍니다. 반면, 생각해보지 못한 관점이었다며 앞으로는 더 주의할 것에 대해 스스로 다짐하고 조용히 이야기를 전해주는 남성 개발자분들도 많아지고 계세요. 혼자 말고, 이제 함께 행동하시죠.
마무리 하며 (´▽`)
2021년 2월 28일에 작성
이슬아 작가님의 『일간 이슬아』 를 구독하고 있습니다. 주말을 제외하고 평일에는 매일 작가님의 이야기를 전해주시는데요. 가끔 친구분들의 글을 대신 전해주기도 합니다. 이슬아 작가님의 친구이신 현희진 시인님의 글을 읽다가 ‘내가 먹는 것이 곧 내가 된다.’ 라는 구절을 접했어요.
‘내가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곧 내가 된다.’ 너무나 당연한 말 같지만 내가 무엇을 말하고 어떻게 행동했는지 인지하는 사람만이 이 말의 뜻을 알겠죠. 참지 말고, 인내하지 말고, 말하고 행동하세요. 그래도 되는 일입니다. 함께 연대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넓고 또 힘도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시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