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자 레이첼에게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E.001

Mijeong (Rachel)
6 min readApr 3, 2021

2020년, 페이스북에 글 하나를 올렸습니다.

저는 평소에 개발, 프로덕트, 여성 3가지 키워드로 대화를 자주해요. 대화를 통해서 많은 깨달음도 얻고 지인들의 이야기를 공유하면서 또 깨달음을 얻고 그랬어요. 문득, 누구에게 고민을 털어놓거나 질문해야할지 모르는 사람들도 많지 않을까? 다른 분들에게도 이야기를 들으면 또 몰랐던 깨달음을 얻게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했어요. 화려하고 거창하지는 않지만 어떤 고민이든 어떤 질문이든 편하게 남겨주시면 진지하게 고민하고 좋은 형태로 답을 드릴게요. 제 이야기가 답이 아닐 수 있지만 답을 찾아가는 과정도 의미있을 것 같아요. 공유는 환영입니다!

수많은 고민과 질문이 저에게 도착했습니다. 뉴스레터 형태로 고민에 대한 저의 생각을 공유하고 있고요. 그렇게 공유한 저의 생각을 이곳에도 기록으로 남겨둘까 합니다.

✏️ 오늘의 질문: 여성/생존

현재 인프라팀에서 근무를 하고 있고 더 개발을 많이 하는 직군으로 변경하기 위해 준비 중입니다. 지금도 남녀 성비 불균형이 심한데, 여성 개발자로서 자립하고 영감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을 만나려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나요?

⭐️ 레이첼의 생각

세월이 많이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우리가 몸담은 IT 씬 특히, 개발 영역에서는 여전히 남녀 성비 불균형이 심하죠. 성비 불균형에서 오는 차별이 거의 없다고 생각한 제가 속한 지금의 조직도 여성 프로그래머의 비율은 15% 정도인 것 같아요. 일을 시작한지 오래되지 않은 분이시라면 소외된 현실에서 자립에 대한 갈증이 크실 것 같아요. 갈증이라기보다는 생존에 대한 본능일 수도 있겠고요. 일을 시작한 지 꽤 되신 분이라면 여전히 이런 질문을 되뇌고 살아야 하는 그 마음에 위로를 보냅니다.

두 가지 질문을 던져주신 것 같아요. 자립? 그리고 영감을 받을 수 있는 사람 찾기?

자립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서는 것’, 자립의 정의에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스스로 하고있는 일이 누군가에게 의지하지 않고는 해결되지 않으세요? 혹은, 스스로 일을 해결하고 있으나 어떠한 이유로든 인정받지 못함에서 오는 마음에 자립하지 못했다고 느끼세요?

전자의 경우라면 왜 스스로 일을 해결하지 못하는지 그 이유를 찾아야겠죠. ‘노력하세요’ 부류의 이야기로 들리겠지만 내가 왜 스스로 일을 처리하지 못하는지 그동안의 시간을 복기하고 구체적인 이유를 찾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해요.

후자의 경우를 이야기해 볼까요? 이 질감과 비슷하게 고민을 공유해주셨다고 생각해요. 아주 오래된 이야기일 수 있어요. 저는 신입사원 프로그래밍 교육에서 1등을 해보았어요. 당당히 개발 프로젝트에 들어가고 싶다는 제 의견은 묵살됐고 하필 동기가 투입됐고 또 하필 그 친구는 남성이었어요. 그 시점에 ‘여자는 개발 프로젝트에서 버티기 힘들어’ 라는 이야기를 들었죠. 또 다른 이야기에요. 새벽까지 일하는 몇 달의 시간을 보낸 적이 있어요. 그 와중에 선배의 개발 작업을 도와가며 일했고요. 평가 시즌이 왔습니다. ‘네가 일을 잘 처리한 건 알겠지만 XX 선배 연차가 높으니 평가를 더 잘 주자’ 라는 말을 들었어요. 여전히 그때의 상황과 환경을 이해할 마음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또다시 비난을 하고자 이야기를 꺼낸 것은 더 아닙니다. (엿 같은 시절이었지만) ‘내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로 관점을 바꿔보려 해요. 스스로 달성한 일을 많이 공유하세요. 아주 공식적인 채널에서 말이죠. 그 당시의 저는 ‘내가 이렇게까지 했는데 왜 나를 몰라주지’ 라는 원망 섞인 생각이 늘 저와 공존했어요. 사람들은 생각보다 더욱 타인이 달성한 일에 관심이 없습니다. 더욱이 그 무관심에서 여성 개발자는 빈번하게 소외되기도 하니까요. 이메일, 사내 메신저, 협업 도구 가릴 것 없이 내가 한 일을 솔직하게 기록하고 공유하세요. 누군가는 ‘참 시끄럽네’ 라고 할 수도 (네, 제가 들었습니다) 또 누군가는 ‘참 나대네’ 라고 할 수도(네, 또 제가 들었습니다) 있어요. 그 시끄러움이 언젠가는 제가 한 일, 저의 능력을 표현하는 고유명사가 될 수 있어요. 스스로 달성한 일에 필요 이상으로 겸손하지 마시고, 누군가 먼저 알아주길 바라지도 마세요.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래서 지금의 제가 공유 중독자가 된 이유 중 하나였던 것 같아요.

영감을 받을 수 있는 사람 찾기?

우리는 어떤 갈증을 느낄 때 누군가를 혹은 무언가를 찾고는 하죠. 소설 속의 등장인물들에 공감하며 위로받기도 하고, 에세이 속 작가의 경험에 이마를 ‘탁’ 치기도 하고, 또 어느 날은 갑자기 흘러나온 노래에 딱히 정의할 수 없는 갈증을 함께 흘려보내기도 하고요.

참 많이 찾아다녔습니다. 멘토라는 존재를, 쉬지도 않고. 결론적으로 그 시절의 저는 멘토 혹은 영감을 주는 존재 찾기에 실패했습니다. 적지 않은 시간이 흘러 저는 영감을 주는 존재를 제 안에 많이 담아두고 있습니다. 그때의 저와 지금의 저는 어떤 차이였을까 돌아봅니다. 그때의 저는 내가 느끼는 갈증을 한번에 해결해 줄, 그리고 내 지난한 노력을 덜어줄 존재를 찾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의 저는 내 갈증의 아주 자그마한 부분이라도 덜어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작은 한 줌에 집중합니다. 하나의 큰 덩어리를 찾던 제가 작은 덩어리를 차곡차곡 모아 채울 수 있는 사람이 된 거겠죠.

내 이야기 하나. 스타트업을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어설픈 경력, 어설픈 실력 거기에 저는 여자였고 CTO 였습니다. 다른 건 의자에 궁둥이 붙이고 있는 꾸준함으로 해결할 수 있겠는데 무엇보다 리더십에 갈증이 있었습니다. 더 날 것 그대로 이야기하자면 리더십이 있는 여성 선배를 찾는 일이겠습니다. 마침 여성 엔지니어 대상 행사가 많이 열렸고, 행사마다 만나게 되는 또 다른 여성 CTO와 대화할 수 있었어요. 아주 가벼운 분위기의 대화였지만 내가 아직 해결하지 못하고 품고 있던 고민을 이미 겪어온 분이라는 확신이 들었죠. 저는 그분의 리더십에만 집중했고 많이 공감했고 또 연락했고 결국 함께 일하고 있게 됐네요.

내 이야기 둘. 어느 날, 제가 선택한 기술과 방법론에 대해 ‘왜?’ 라는 질문을 쉴 새 없이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 많은 질문에 제대로 된 답을 단 한 번도 하지 못했어요. 그날은 정말 많이 취했던 기억이 나네요, 온통 초록 물결. 숙취에서 벗어난 후 엄청난 갈증이 찾아왔습니다. 나는 왜 ‘왜?’ 라는 질문에 답하지 못했을까. 항상 문제를 찾고 적절한 해결책을 적용하는 사람이 엔지니어라고 말하고 다니는 내가 정작 ‘왜?’ 에 답을 못한다는 사실이 큰 충격으로 다가왔죠. 저에게 이 고통을 동반한 깨달음을 전해준 그분을 더 염탐(?)하기 시작합니다. 정말 사소한 것 하나에도 납득할 만한 이유 없이는 행동하지 않는 분이셨죠. 그 이후로 저는 제가 하는 선택에 스스로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되었어요. 그때, 수십번의 ‘왜?’ 라는 질문이 그분을 염탐하게 만들고 결국 제 사고 과정 자체를 흔들어 놓은 셈이죠.

내 갈증이 무엇인지 스스로와 먼저 대화하세요. 분명 하나의 덩어리로 대답할 수 있는 것이 아닐 거라 생각해요. 그 작은 덩어리들이 무엇인지 나열해보세요. 그게 간접적이든 직접적이든 하나하나 채워갈 수 있도록 곁을 내어주는 분들이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단, 그 영향을 어떻게 흡수할지 행동하는 건 역시 본인의 몫입니다.

마무리 하며 (´▽`)

2021년 2월 7일에 작성

정세랑 작가님의 ‘시선으로부터’ 라는 책에 이러한 구절이 있습니다.

『세상엔 온갖 주제에 대한 책이 있다는 게 늘 안심이었다. 다 좋은 책은 아니지만 형편없는 책은 형편없는 책대로 기묘한 웃음을 주기도 하고 말이다.』

사람도 마찬가지겠죠. 내 안의 필요성을 단 하나로 정의하기란 좀처럼 쉽지 않을 거예요. 나에게 필요한 누군가 혹은 무언가는 끊임없이 많아지고 또 달라질거에요. 조금 여유 있는 긴 호흡으로 아주 조금씩 내면을 채워나가시길 바랍니다. 저도 그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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