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한국 사회의 여성이다: 노력의 계기

Mijeong (Rachel)
5 min readApr 20, 2020

올해의 목표 중 하나는 분기마다 여성으로서의 나를 글을 통해 드러내는 것이다. 이러한 작은 소리가 모여 여성의 존재 자체가 온전히 인정받는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렇게라도 소리 내 마음속의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나를 응원한다.

나는 한국 사회를 견디고 버티는 34살의 여성이다. 직업은 개발자이고 베트남에서 서비스를 만들고 있는 회사에서 리드 개발자로서 팀을 이끌고 있다. 적지 않은 연봉을 받고 편안한 집에서 삶을 유지하고 있다.

많은 사람에게서 연락을 받는 편이다. 응원을 하는 사람들도, 응원을 받고 싶은 사람들도, 조언을 구하는 사람들도, (원치 않는) 조언을 하는 사람들도. 그들에게 나는 한국 사회에서 그리고 성비 불균형이 심한 개발자 업계에서 약자/소수자 라는 현실을 극복하고 성공을 향해 가는 사람으로 비칠 것이다. 나는 정말 내가 맞닥뜨린 현실을 극복한 사람일까? 남성이라면 하지 않아도 될 과한 노력으로 여전히 버티고 있는 사람일까?

나는 여전히 버티고 있다. 새로운 회사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면 그들이 만든 여성 개발자라는 한계를 의식한다. 나를 증명해 보이기 위해 과하게 노력한다. 매일 밤을 새우다시피 일하고, 나도 다 할 수 있고, 나는 더 잘 할 수 있음을 꾸준히 증명한다. 고단한 그 시기가 지나면 돌아오는 결과는 ‘여성 개발자치고 꽤 하는데’ 라는 벽을 넘지 못한다.

나는 한국 사회의 여성들이 나처럼 매일을 노력이라는 프레임 안에 갇혀있기를 바라지 않는다. 여성이라서 받는 불이익을 이야기할 때 노력이 부족한 여성들의 투정으로 평가받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내 노력을 멋있게 포장하기 보다는 내가 받은 차별, 모욕을 드러내보고자 한다. 잘못된 건 더 노력하지 않는 여성이 아니라, ‘여성이라서 받는 불합리를 방치한 이 사회’다.

여성이 할 수 있는 일, 그게 뭔데?

첫 (정규직)직장에서 내가 속한 팀의 신규 입사자는 나와 남성 동료 두 명이었다. 신입 연수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우리는 참여할 프로젝트를 선택해야 했고, 선택 가능한 프로젝트는 SI 프로젝트와 SM 프로젝트였다.

- SI(System Integration): 전산 시스템이 필요한 곳의 프로젝트를 받아 초기 시스템을 구축하는 일

- SM(System Management): SI 프로젝트를 통해 구축된 시스템을 유지보수 하는 일

당시 두 프로젝트에 대한 이미지는 이랬다. SI 프로젝트는 빈번하게 야근하며 주어진 일정 내에 개발을 완료해야 하고, SM 프로젝트는 상대적으로 야근은 적지만 고객과 빈번한 커뮤니케이션이 힘든 일이었다. 어느 날, 팀장은 나를 불렀다. 어떤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싶냐는 질문과 함께 따라온 다음 말은, ‘SI는 밤새는 날도 많고 여자가 하기 좀 힘들다’ 였다. 질문은 왜 한 것이며, 도대체 여자와 밤샘의 상관관계는 무엇이란 말인가. 남자에게는 없는 한계가 왜 여자에게만 이렇게 적용되는지, 심지어 1도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여자가 하기 힘든 일 혹은 못 하는 일은 지겹도록 많이 들어왔지만, 남자가 하기 힘든 일은 기억에 잘 없다. 뭐 어쨌든, 개발을 많이 하고 싶었던 열정 많던 시절의 나는 꿋꿋이 고집 피우며 SI 프로젝트에서 많이 밤새며 많이 개발했다.

‘여성이 할 수 있는 일의 한계를 너희가 정하지 마라, 제발.’

내가 왜 치마 입고 춤춰야 합니까?

첫 직장은 굴지의 대기업 중 하나였다. 내 또래의 사람들이 매우 그러했듯 나 역시도 회사 생활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하고 넘긴 뭐 같은 일들이 많았다. 의전이라는 단어로 포장되어 여성에게 가해지는 폭력이 그러했다. 임원이 우리 팀을 방문하는 날에는 당연하듯 여성 직원들은 옷을 갖춰 입고 혹시라도 건물로 들어서는 길에 넘어지실까 내리는 차에서부터 졸졸 따라다녔다. 회식을 하러 가면 만취해서 몸도 못 가누는 여성 동료는 역시 분위기 메이커라며 다들 떠받들기 바빴다. 만약 회사에서 여성 직원에게 기대하는 능력이 분위기 메이커라면 나는 빵점짜리 회사생활을 했다. 실제로 소름 돋게 자리잡은 그 구식의 문화를 거부하다 사회 부적응자 소리도 더러 들었으니 말이다.

‘회사에서 너희가 정한 여성성을 강요하는 건 폭력이다, 철 좀 들어라.’

그놈의 ‘여성 개발자치고’

솔직히 말하면, 나는 정말 열심히 산다. 공대생 시절부터 지금까지 누구보다 열심히 살고 있다. 잠은 죽어서 자면 되지 라는 마음으로, 깨어있는 시간을 꽉꽉 채워서 일하고 공부한다. 그 노력의 결과로 팀을 이끌고, 책임과 권한을 받고, 좋은 대우를 받고 있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내가 부정하는 것은, 내가 열심히 살게 된(?) 계기다.

약 150명의 컴퓨터 공학부 학생 중, 2–30명이 여성이었다. 기계 공학부와 같은 다른 공대 학부와 비교해 여성 비율이 높은 편이었다. ‘여자애들은 남자 선배한테 과제 부탁하는 존재’로 여겨지는 시절이었다. 너희 도움 따위 없어도 혼자 잘 해낼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밤낮없이 노력했다. 그리고 남자 선배들의 과제를 돕는 사람이 되었다.

새로운 회사에 가면 계획했던 일정을 맞추면서도 다른 사람의 일을 돕는 포지션을 선택했다. 물론 이 과정에 충분한 잠은 없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서 내가 받은 인정은 ‘잘하는 동료’ 보다는 ‘이렇게 하는 여성 개발자 처음이에요’ 라는 반응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냥 잘하는 동료가 되기 위해 더 노력했다.

이게 노력의 건강한 계기가 되는가?

‘나는 그냥 너보다 잘 하는 거야. 여성 개발자치고 잘하는게 아니고. 어떻게든 인정하기 싫은 쪼다야.’

다시 한 번 말한다. 나는 나의 현재가 멋있게만 포장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나는 여전히 나의 과거가 괴롭고, 괴로운 과거를 벗어나기 위해 노력이라는 프레임 안에서 발버둥 치지만, 결국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얼마 전, 동료와의 술자리가 있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스스로 목표를 ‘여성 리더십’이라고 표현했다. 함께 있던 동료는 ‘미정 님은 여성 리더십이 아니고 그냥 리더십이 있는 분이에요.’ 라고 답했다. 세상에나, 남성 리더십은 들어본 적도 없는데 내 입에서 여성 리더십이라니.

많은 여성이 그 존재 자체를 인정받기를 원한다. 여성이라는 한계 내에서 인정받기를 원하지 않는다. 뛰어나지 않아도 보통의 여성들도 보통의 남성들이 누리는 것을 당연히 얻을 수 있기를 바란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