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2021 개인 회고
워낙 굴곡이 많은 해를 보내서 ‘회고를 해도 되나?’ 라는 생각으로 마음을 접고 있었다. 이곳저곳에서 회고를 안 쓰냐는 연락을 받기도 했고, 다른 분들의 다양한 회고를 읽고 나니 ‘굴곡이 많았으니 회고를 써도 되는 것 아닌가?’ 라는 마음으로 바뀌었다. 일기장에 펜으로 끄적였던 올해의 키워드를 중심으로 나의 2021년을 돌아본다.
1. 두 곳의 회사
올해 초에는 계획했던 퇴사와 연말에는 계획에 없었던 퇴사를 했다. 앞으로도 일 년에 퇴사를 두 번이나 하는 일은 좀처럼 없을 것 같아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다. 두 곳 모두 개발자이자 매니저로서 역할을 했고, 내가 경험하거나 깨달은 것은 무엇이었나 곱씹어봤다.
복잡한 도메인/시스템 설계
올해 이전에도 복잡한 도메인이나 시스템에 대한 경험은 있었지만, 이를 위한 설계를 주도적으로 이끌면서 접근 방향에 대해 본격적으로 기준이 생긴 것 같다.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 그리고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는 무엇인가? 프로덕트/회사의 방향과 일치시키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과 포기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시스템 간의 영향도는 어떻게 되는가? 확장성은 어느 수준까지 고려하는 것이 적절한가? 팀의 합의는 어떻게 끌어내야 하는가?
기술(시스템), 팀, 회사(프로덕트)를 모두 배제하지 않고 복잡한 문제 해결을 이끌어가는 경험은 개발자로서 큰 의미가 있는 경험이었다.
함께 달성하는 성과
개인 SNS에 지겹도록 이야기했지만, 개인보다 팀이 성과를 만드는 일에 진심이다. 몇 년 전, 매니저 일을 처음 시작했을 때 괜찮은 매니저가 되기 위해 세웠던 기준인 ‘개인의 성과보다 팀의 성과에 집중’ 이 시작이었던 것 같다.
첫 번째 퇴사를 한 회사였던 우아한 형제들 베트남에서는 2년이 넘는 시간에 걸쳐 오랜 시간 함께했던 멤버들과 새로운 멤버들, 그리고 급격한 서비스 성장과 복잡도 사이에서 어떻게 우리가 함께 성장할 수 있는지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팀원들과 많이 대화하고, 또 팀원들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방향을 제시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두 번째 퇴사를 한 스타트업에서는 변화와 성장에 갈증을 느끼고 있던 기존 멤버들과 함께 어떻게 변화할 수 있는지 고민했다. 문제라고 이야기하는 것들의 배경을 충분히 듣고 이해하고, 작은 변화를 실천해서 동기부여를 주고. 짧은 시간이었지만 밀도 있는 ‘함께’ 의 경험을 했다. 회사를 나오기 전, ‘한 사람이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많은 것들을 변화시킬 수 있구나.’ 라는 감사의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변화할 수 있었던 건 진심으로 받아들인 멤버들의 덕분이었다고.
일, 돈 그리고 사람
직장인으로 회사를 선택하는 것의 지표는 일, 돈 그리고 사람일 테다. 사람이라는 지표가 내 선택에서는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사람에 대한 기준은 실력이 좋은 사람 혹은 유명한 사람이 아니다. 동료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있고, 개인이 아닌 팀으로 일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다.
2. 집필
역자는 여러 번 해봤지만, 저자는 엄두가 나질 않았다. 내가 직접 책을 쓴다는 것은 너무나 뜬구름 잡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출간 제의는 계속 거절해왔었다.
어느 날, 골든래빗 출판사의 최현우 프로 에디터님(이하 ‘프로님')으로 부터 출간 제의를 받았다. 왜 내가 해당 주제로 집필해야 하는지에 대한 성의있는 제안에 처음으로 진심으로 고민했고 결국 올해 9월 세상에 내놓는 것에 성공했다.
책을 만들면서 또 새로운 협업을 경험했다. 프로님은 심하게 꼼꼼하셨으며 당연하게도 저자보다 책을 잘 만드는 것에 대해 욕심이 많으셨다. 어휴 ㅋㅋㅋ. 1차 원고를 작성하고, 2차 원고 수정을 거치고, 베타 리더 분들의 의견을 반영하고, 인쇄에 들어가기 전까지도 구성에 대한 논의를 하고. 이 책의 기본 컨셉과 우리가 담고 싶은 내용 사이에서 치열하게 의견을 주고받으며 함께 완성했다.
작년까지만 해도 책을 집필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부담과 동시에 어깨가 으쓱하는 면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책을 집필하고 있는 것과 결국 완성하여 세상에 내놓는 것은 비교가 안 되는 일이다. 앞으로는 책을 집필하는 중에 어깨가 으쓱하는 건방은 떨지 않게 될 것 같다.
추가로, (감히 또 겁도 없이) 프로님에게 ‘타입스크립트’와 ‘시스템 설계’ 책을 집필하고 싶다는 말을 해버렸다. 새해의 나에게 맡겨본다고 했으니 우선 지금은 마음만 갖고 있어야지.
3. 발표/강의
자칭타칭 공유 중독자로서 내 지식과 경험을 공유하는 일을 즐긴다. 이제는 이 바닥(?)에 10년 정도 있었으니 일종의 의무감도 있는 것 같다.
- Wanted Con. 누구나 할 수 있는, 기술리더로 성장하는 법.
- 대덕소프트웨어마이스터고. 진로 및 취업콘서트.
- 스여일삶. 별난 직장의 여자들.
- 깃 & 깃허브 라이브 발표.
- 탈잉. 월간 코드리뷰.
- 스여일삶. 별난 직장의 여자들 완결편.
- OKKY. 깃허브 저자 네라쿠배 개발자의 커리어 이야기.
- 그 외, 유튜브 라이브 방송 참여 등.
올해 해외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이런저런 행사에서 공유할 기회가 많았다. 주로 개발자 그리고 매니저로서 성장에 대한 이야기, 진로에 대한 이야기 등을 다뤘다. 공식적인 발표나 강의는 아니지만, 가끔 몇몇 회사의 개발팀이 겪고 있는 문제에 대해 의견을 드리는 일도 하면서.
해외 생활 정리로 여유가 없어서 거절했던 강의 제작 기회들도 있었고, 지금은 집필과 유사하게 제작하고 싶은 강의 주제들도 있다. 새해에는 또 다른 의미 있는 공유를 시도해보자.
4. 직장인 N대 허언
우리가 아는 직장인 N대 허언이 많다. 1년의 1/3이라는 시간은 어딘가에 소속되지 않고 자유롭게 지낸 덕분에 몇 가지 허언을 실행해볼 수 있었다.
퇴사. 말해 뭐해. 두 번이나 했다.
제주살이. 꽤 넉넉하게 시간을 갖고 제주의 고즈넉한 집을 빌려서 지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늘 커피 사러 나가는 게 일상인데, 나가는 길의 풍경이 극적으로 평온했다. 온통 집과 돌담 그리고 풀로 가득한 길을 거닐어서 커피를 사러 가는 길의 기분이 여전히 선명하다. 제주에 사는 옛 동료를 만나 한 달 살기를 위한 정보들을 얻어와서 곧 다시 떠나지 않을까 기대한다.
유튜브. 채널을 만든 게 얼마 안 됐지만 어쨌든 실행은 했으니 허언이 아닌 것으로 하자. 시작은 영상 편집 도구를 학습하는 게 흥미로워서였고, 한동안은 꾸준히 업로드해보는 것으로.
5. 그 외
결혼
좋은 사람을 만날 것에 대한 큰 기대가 없었는데, 찾아왔다(?) 아니 찾아냈다. 우리는 베트남에서 웨딩촬영을 하고, 혼인 신고를 했다. 나를 향한 걱정과 조언을 온전히 나를 두고 생각하는 사람이라 참 예쁘다. 요즘 남편과 한 약속은, ‘온전히 쉬어보기’ 이다. 쉬고 있다고 하지만 책을 쓰고 강의를 하고 일상을 정해진 약속 내에서 바쁘게 살아가는 나를 보고 남편이 꼭 부탁했던 일이다. 누군가와의 약속이나 의무감이 없는 선에서 해보고 싶은 것만 하는 시간을 가져보기. 덕분에, 처음으로 ‘나 쉬고있구나’ 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귀국
2년 반을 살았던 베트남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누군가를 만나는 일에서 에너지를 과하게 소모하는 사람이면서 친구도 많지 않은 나라서 타국에서의 삶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라 착각했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는 타국에서의 고독한 삶은 글쎄, 이제는 혼자서는 하지 않을 것 같은 일임을 깨달았다.
하지만, 오랜만에 서울에서 살 곳을 구하는 과정은 정말 힘들었다. 더군다나 국내에서 몇 년 동안 수입이 잡히지 않았던 사람에게는 더더욱 가혹했다 흨.
독서
책 읽기는 늘 취미이고 올해도 꾸준히 읽었다. 그중에 책의 구절을 바탕으로 작가의 생각과 경험을 담아 새로운 책으로 내놓은 2가지가 참 좋았다.
- 책의 말들: 다른 세계를 상상하고 공감하기 위하여 — 김겨울 작가
- 태도의 말들: 사소한 것이 언제나 더 중요하다 — 엄지혜 작가
나 자신과 일상을 돌아볼 기회를 준 책들이었다.
운동
운동을 꾸준히 하는 건 어렵지 않을 정도로 단련된 사람이다. 올해는 남편과 함께 웨이트에 취미를 붙였다. 몇 년 만의 추운 겨울이 당황스러워서 지금은 홈트로 대체하고 있지만, 새해에는 다시 근육을 잘 키워보자. PT 쌤이 안 나오시냐고 문자해서 무서워서 그런 건 절대 아니다.
피드백
유난히도 함께 일했던 동료들 혹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피드백을 많이 받을 수 있었던 해였다. 이별을 맞이했던 동료들도 많았고, 함께 일했던 경험은 없지만 내 활동을 관심 있게 지켜봐 주고 연락을 주시는 분들 덕분에 나의 강점을 더욱 알 수 있게 됐다.
개발팀 매니저로 내가 어떤 강점을 가졌는지, 팀과 시스템의 변화를 이끌어 내기 위해 내가 어떤 노력들을 했는지, 나의 글과 행보를 통해 용기를 얻거나 방향을 잡아가고 있다든지, 다양한 피드백 덕분에 더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다가오는 2022년에는 건강하게 몰입하고, 또 새롭고 의미 있는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될 것 같다.